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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번. 실용적 독서/▶ 인문

[Book] 십자군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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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설명

'독일에서 비밀리에 이탈리아로 들어온 황제는 교황이 체제중인 카노사 성 앞에 섰다.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자답게 얇고 수수한 옷차림으로 줄기차게 쏟아지는 1월의 눈을 맞으며 내내 맨발로 서 있었다.'

교황이 황제를 파문한 세기의 사건. 그로 인해 황제가 대망신을 산 사건.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배운 '카노사의 굴옥'이다. 주교를 임명하는 서임권을 둘러싼 이 싸움에서 교황이 승리했다. 그러나 그 후는 ~

초유의 사건 이후 파문 당한 하인리히 황제는 '가해자'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에 단단히 복수를 한다. 실제로 교황은 죽을 때까지 로마 땅을 밟지도 못한다. 후임 교황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사건이 십자군 전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후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원정을 제창함으로써 하인리히에 대한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으로 십자군이 구성된다.

우르바누스 2세는 대담한 승부를 건 것이다. 선임자인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를 사흘 밤낮 눈 속에 세워둠으로써 로마 교황의 권위를 과시했지만, 그 강경책의 결과를 직접 경험한 우르바누스 2세는 로마 교황의 권위, 즉 세상의 모든 군주를 지도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은 다름 아닌 로마 교황이라는 것을 수십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동방에 보내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탈환함으로써 보여주려 한 것이다. (28P)

바로 이 1권은 십자군이 1096년 유럽을 출발해 집결지인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예루살렘을 정복하기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그 한마디의 위력은 엄청났다. 중세 유럽의 독실한 그리스도교도는 하루하루의 사소한 죄가 쌓이고 쌓여 사후에 지옥에 가지 않을까 하며, 두려움에 떠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 교황이 십자군에 참가하는 행위만으로 모든 죄가 용서된다고 약속한 것이다. 천국의 자리를 예약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가족을 남겨두고, 밭을 버려두고 먼 동방을 향해 떠나는 사람들의 물결을 이루었다.
 십자군 원정의 기세는 눈 깜짝할 사이에 프랑스 전역을 휩쓸고, 라인강을 넘어 독일로, 그리고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파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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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지식
 

 십자군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런 저런 주변 배경이 필요한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세계지리 같은 과목과는 담을 쌓았던 나 같은 경우는 더욱 유럽과 중동의 지리적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또한, 중세 유럽에서 사용하는 용어들 예를 들면 기독교관련 용어 및 계급등과 같은 배경 지식이 요구되어 졌다. 

 그래서 이 Post 는 아마도 십자군 이야기에 대한 나에 대한 생각 뿐 아니라 필요한 배경설명을 하는 내용이 되지 않을까 싶다.

◆ 첫번째 - 중세 귀족의 등급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순서로 나아간다.

작위의 승계는 공,후,백,자,남작이 모두 동일하며 장자가 아버지의 작위(공작이면 공작)를 승계하고, 차남이하의 나머지 아들들은 그보다 한단계 아래의 작위를 세습받게 됩니다.

다만 남작같은 경우는 차남이하 나머지 아들들은 귀족의 작위가 없어지므로 준남작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공,후,백,자남은 동양식 작위로써, 따라서 로마시대의 작위를 기준으로한 서양의 작위는, 서양의 절대주의 왕정시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백작, 후작, 공작 들은 작위에 크게 상관없이 세력크기에 따라 서열이 정해집니다.]

1. 공작(duke)
- 원래 로마의 사령관 직위에서 비롯된 직위로, 샤를르마뉴 치하에서는 각 군사구를 관리하는 고위사령관 직이었다. 그러나 점차 각국의 국왕과 맞먹는 권력을 지닌 제후들을 지칭하는 직위가 되었고, 국왕의 장자(차기 왕)을 제외한 나머지 왕자들에게 세습되는 작위이다. 왕족 계열이 아닌 공작도 있으며 왕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최고의 작위

2. 후작(marquis)
- 변경의 공작, 변경의 군사구의 군사권 및 통치권을 위임받은 작위, 공작 다음의 작위

3. 백작(count)
- 원래는 한 개의 주를 관리하던 관리, 후에는 한개의 주를 통치하는 대영주를 지칭하는 작위가 된다. 
  대개 백작부터 대영주로 인정을 받았다.

4. 자작(viscount)
- 백작의 부관으로 백작을 대신해 각 영지를 통치한 대리자. 대게 백작의 차남 이하의 자식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5. 남작(baron)
- 대게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는 소영주를 지칭하는 말, 영국에서는 국왕으로 부터 직접 봉토를 받은 영주를 지칭하기도 했다.

◆ 두번째  -  예루살렘의 종교적 의미

 
성경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한 명은 이스마엘이고, 한 명은 이삭입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첩의 아들이고, 이삭은 본처의 자식입니다. 그렇다 보니 이스마엘은 집을 나갔지요.
 그렇게 방황하다가 지금의 아라비아 반도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의 후손이 마호메트라는 것입니다.)
 얼마 후 아브라함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 이 모리아 산이 예르살렘 한 복판에 있다.) 
 그런데 코란에서는 알라의 명으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조상이 제물로 바쳐진 성스러운 돌이 있는 예루살렘이 이슬람교의 성지가 된 것이지요. (지금은 그 돌위에 황금 돔이라는 모스크가 세워짐)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 유태인들은 원래 유프라테스 강 남쪽 지역 (현재의 이라크 남부)에 살고 있다가 이 지역에 사막화로 인한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풍요로운 이집트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먹을 것은 있었지만, 노예나 다름 없는 생활을 했는데, 모세가 이들을 이끌어내어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는 다양한 종족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미 정착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자연 유태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간에 전행이 발발했고, 그 결과 유태인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정복하자, 유태인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갔습니다. 로마가 멸망하고 사라센 제국이 아랍지역을 통치하자, 아랍족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묘하게도 예루살렘은 기독교의 성지인 동시에 마호메트의 4대 성지가 되었습니다.

 유럽으로 이주해 간 유태인들은 뛰어난 상술을 바탕으로 경제력을 넓혀갔습니다. 물론 사회적 신분은 낮아서 불만이 있었지만, 남의 땅에 사는 처지에 드러내 놓고 불만을 표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대가 흘러 19세기가 되자 유태인들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그동안 산업혁명을 통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된 영국은 아랍 지역도 자기 세력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세계 제1차대전을 일으키자 다급해진 영국은 유태인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특히 독일 등 유럽 본토에 있는 유태인들에게 영국이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유태인에게 돌려 줄테니, 전쟁 비용 등을 지불하여 영국을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유태인들은 드디어 설움 많은 타향살이를 끝낼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영국을 도왔고, 그 결과 세계1차대전을 승리로 이쓸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때부터 더 커졌습니다. 예루살렘을 돌려주기로 했던 영국이 차일피일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차대전에 패배한 독일 사람들 가운데 패전의 책임을 자국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고조되었으며, 히틀러가 이를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그는 유태인 학살을 지시했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다시 영국 등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유럽의 유태인들은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200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국가를 건설하고, 다시는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기대감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향 땅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순박하고, 종교생활 열심히 하고, 국제정세와는 무관하게 살던 사람들이지요.
 이들은 처음에는 유태인들을 배척하지 않았으나, 유태인들이 자기들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건설하고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침범해오자 아랍세력을 등에 없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세계 최강 미국을 등에 없고 있는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 세번째  -  교황이 황제보다 더 큰 힘을 가지게 된 배경

 초기 교황은 로마 시의 주교로서, 성직자와 신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세속적인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러나 기독교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신자들의 수가 늘어낳고, 엄청난 교회 수입의 주인이 되었다.
 주교들은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자청하면서, 정신적 영역의 통치자가 속세의 통치자들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고 주장했고, 후에연스럽게 교황으로 불리게 되는 주교는 황제보다 더 높다고 주장했다.

 대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재임 중 로마제국은 폐허가 되어있었으며, 오직 기독교 교회만이 유일하게 조직화된 권력으로 등장했다. 교황은 매달 첫째 날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사품을 돌렸다.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이탈리아의 아버지로 불린 이유도 우연이 아니었다. 롬바르드족이 로마를 침공해 왔을때에도 혼자 맞서서 그들을 타이르고 설득했던 사람이 바로 그레고리우스였다. 이 외에도 선교단을 사방에 보냈는데 브리튼을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도 그였다. 

 당시 그리스 정교로 불리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와 로마의 교회 사이가 좋지 않았다. 730년 경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성상의 사용에 대해 이탈리아 교회와 일대 논쟁을 버렸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에 종교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싸움에서 결국 로마 교회가 승리하면서 비잔티움 교회는 밀려나 자신들의 그리스 정교를 흑해와 러시아로 확장하면서 서유럽을 포기하게 되었다.
 
 프랑크족의 군주들은 난세에 후원과 지주가 필요했다. 로마의 교황들 또한 확고한 지지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교황은 이들에게 왕과 황제의 관을 씌어주는 대신 힘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샤를마뉴 이후 프랑크제국은 산산이 분열되었고, 프랑스, 독일, 프랑켄, 로렌과 같은 공국의 형태로 변화됐다. 샤를마뉴가에 대한 지칭이었던 카롤링거 왕조의 몰락은, 프랑크 황제들이 통치하면서 교황들과 긴밀한 연관을 가졌던 이탈리아에 커다란 재난을 가져왔다. 지지기반이 없어진 교황들은 다시 힘을 잃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