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11월 부터 수원시 평생교육원에서 인문학 강좌를 시작하는데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그 강좌를 수강하려 한다. 강좌를 살펴보니 첫번째 날의 참고 목록이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와 공부론이었다. 아마도 실제 인문학을 시작하면서 왜 공부를 해야 하고 어떤 것이 진정한 공부인지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이든다. 그래서 이런 강좌에서 선택한 도서라면 나름 괜찮을 것 같다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내 손으로 오게 되었다.
처음 책이 집에 도착했을 때, 비교적 얇은 책에 겉표지도 위의 모습처럼 살짝 장난기가 있어 보였다. 제목 또한 그런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책머리글을 읽어내려가면서 오호! 이책 괜찮은데, 이번에 괜찮은 책 하나 건졌네.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탁 쳤다. 역시 읽어내려가면서 오~~ 하는 작은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첫번째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것이다. 우선 현재 교육시스템과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학교등에 대한 일침으로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은 학교와 학년, 학번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비슷한 나이대가 아닌 같은 나이의 일정한 집단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나이가 다른 사람들과의 일종의 벽을 만든 다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주변의 사람들을 잠깐 살펴보면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 동기들, 회사 동기들 이렇게 같은 나이 대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지낸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제도가 만들어낸 획일화된 것 중의 하나인 것이다.
예전 18~19세기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 박지원, 이덕무 등 이들은 나이 차이는 비록 10살을 넘나들었지만 이들은 앎과 지식이라는 토대를 통해서 우정을 쌓고 진정한 벗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제도는 이런 것을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짧은 글을 통해서 나도 아~! 내가 이런 것에 얽매여 사는 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실은 나도 선배, 후배 이런 것들에 대해 나름 중시할 때도 많이 있는데, 이것은 결국 내가 보기좋게 이 사회의 정책에 순응하고 동화되어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들에게 조금 더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벽을 만들어 사전에 차단한다는 느낌을 받아서이다.
두번째는 예전의 배움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배우고 싶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명문대, 지방대, 전문대 할 것 없이 실제적으로 교수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학생들은 별로 없다. 이것은 학생은 학교를 단순히 취업을 위한 하나의 통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뿐이고, 교수 또한 학생들과 함께 지적 갈증을 해소하고 소통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연구와 대학내 시스템내에서의 역할만을 하기 때문이다.
대학, 말그대로 (大學) 큰 학문을 배우는 곳이다. 단지 일정한 나이가 되고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다음의 길을 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큰 학문이란 과연 무엇일까? 취업에 필요한 스텍을 만드는 그런 곳이 아니란 말이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하고, 사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관찰하고, 앎과 철학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자연과 우주에 대해서 한 번쯤 고민해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성찰과 사유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지금의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앎, 지식을 가지고 서로 가르치고 배움을 받는 과정에서 '질문'이 없다는 것은 바로 제대로 된 앎과 지식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져있는 소크라테스의 많은 일화와 말들은 바로 제자들과의 문답법을 통해서 사유되고 만들어진 것 들이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단지 암기식, 주입식 시험에 나오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시험에 나오는 것은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하고 답이 있어야하는 법이다. 그러니 이런 것은 질문의 여지가 많지 않다.
이게 어떻게 제대로된 교육이고 소통을 통한 지식의 향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떤 이를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거나 스승, 멘토로 삼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의 깊은 사유와 사색을 이끌어낼 질문을 하고 그곳에서 그의 앎과 생각을 내 몸 속으로 체화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호모쿵푸스]는 이렇게 총체적으로 내 몸과 마음을 모두 사용하여 공부를 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준다. 공부에는 시기도 없을 뿐더러, 무엇을 배우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알기를 원해서 배우는 것이고 그 시기는 죽기전까지 아니 어쩌면 그 후에도 계속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좋았다. 공부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접근하는 방식, 고전과 인적네트워크를 통한 소통을 중시하는 내용 마음에 들었다.
고미숙 작가의 다른 책을 한 번 읽어봐야 될 것 같다.
빈민들이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매우 '급진적'인 행동이다. 인문학에 대한 공부가 빈민들에게 정치적 삶을 가르치며 진정한 '힘'이 존재하고 있는 공적 세계로 이끌어주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 쇼리스, 희망의 인문학에서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이제 가문이 망했으니 네가 참으로 독서할 때를 만났구나."
실제로 지금 대학생들은 도무지 질문을 할 줄 모른다. 사회에 대해서건 삶에 대해서건 질문이 없다. 왜?
독서를 하지 않으니까. 눈앞의 이익만 좇아가느라 바쁜데, 무슨 질문이 있겠는가. 질문을 하려면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와 마주쳐야 하는 바, 독서를 하지 않고는 그런 마주침 자체가 불가능하다. 질문이 없으니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읽지 않으니 질문이 없고, 오, 이 악순환의 고리!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잇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즉, 기존의 배치를 거스르면서 전혀 다른 욕망의 지도를 그려낼 수 있는 과감성, 전혀 다른 삶을 창안할 수 있는 상상력, 뭐 이런 것들이 창의성의 진짜 의미에 값한다.
토론이건 체험학습이건 그것이 강도 높은 학습의 과정이 되려면 고도의 훈련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토론을 통해 자기 생각을 바꾸겠다는 치열한 의지도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주 유치한 수준에서 헛바퀴만 돌 따름이다. 대학에서는 이런 문제가 이미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학생들의 자율에 맡긴 토론 수업들은 백발백중 실패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일단 지금 대학생들은 삶과 사회에 대한 물음이 없다. "공부하는 사람이 의심할 줄 모르는 것은 크나큰 병통이다. 오직 의심해야만 자주 분석하게 되고, 그렇게 하서 의심을 깨뜨리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라 했다. 그런데 바로 이 의심이 없는 학생들끼리 백날 토론을 해 본들 '그 나물의 그 밥', '다람쥐 쳇바퀴'일 뿐이다. 교수와 학생 간의 신뢰가 생기지도 않을 뿐더러, 수업의 생동감도 완전 땅에 떨어지고 만다.
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 데 있다고 한다.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어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과 벗을 찾아가는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공부다.
보통의 적성과 학습 의욕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 만약 이러한 전통적인 방법(반복학습)의 교수를 받게 된다면 2~3개월 만에 습득할 수 있는 기능은 많이 있다.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는 날로 번성하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소통을 단절되고 있다.
구술 능력은 리더십으로 연결된다. 사실 리더십의 많은 부분은 상황을 '언어화하는'능력이다. 어떤 상황에서 그걸 하나의 주제로 엮을 수 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 때 그는 그 그룹의 지도자가 된다. 한번 주변을 살펴보라. 어떤 그룹이든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이는 '썰을 푸는'인간이다. 상황을 언어화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그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만약 새로운 말과 이야기로 세상을 보는 눈을 홀라당 뒤집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혁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혁명은 늘 새로운 말, 낯선 이야기들과 함께 등장했다. 21세기 혁명의 거점인 사파티스타의 구호 또한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이지 않은가
'유머, 세상을 바꾸는 힘' 이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살이에서 웃음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웬만한 유머만 있어도 평생 밥 굶을 염려는 없다.왜냐? 유머스러한 사람들 옆에는 사람들이 꼬이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유머의 힘을 제대로 터득하려면 단순한 말장난이나 개그 정도로는 좀, 어렵다. 그건 잘못하면 푼수데기로 찍히거나 입만 살았다고 밉상이 되기 십상이다. 진정한 유머는 무엇보다 사건과 사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와 간극을 관찰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그의 말 속에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기발한 착상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고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유머의 기술과 구술 능력은 뗄 수없이 결합되어 있다. 이야기를 잘하다 보면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고, 웃음이 야기되다 보면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도 한다. 이렇게 현자을 장악하는 능력이 커지면 그게 다름 아닌 리더십이다.
송나라 때의 유명한 기철학자 장재가 말했듯이, "배움이 크게 이롭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기질을 바꿀 수 있어서다." 그리고 그 배움의 핵심은 다름 아닌 독서다. 책을 읽으면 제갈량이나 허생만큼은 아니더라도 누구든 신체의 에너지와 기운의 분포를 바꿀 수 있다. 한 권 읽으면 한 권만큼, 백권 읽으면 백 권만큼.
이건 절대 공허한 말장난이 아니다. 중국철학사의 이단아 이탁오는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은 책을 열면 곧 거기에 있다. 책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일 것이요, 정신은 또 천만 배나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 이탁오를 하루 종일 면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피노자에 따른 "모든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큼 신을 만나다"
너는 무엇을 먹고 마실까보다 누구와 먹고 마실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친구를 사귀려면 좋은 제도나 서비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진입하고 우발적 마주침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덕을 날마다 새롭게 하려면 모름지기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하고, 스승을 만나려면 모름지기 묻기를 좋아해야 한다.
"별로 아는게 없는데도 배울 수 있을까요?" 중요한 지식의 양이 아니다. 자신을 진정 비울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배움에 있어 가장 불리한 조건은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 혹은 이미 획득한 지식에 갇혀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성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양이 많건 적건 '비움'은 배움의 필수적 조건이다. 끊임없이 비울 수 있어야 더 큰 앎이 흘러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외부와의 '네트워킹'을 통해 증식, 변용되는 법인데, 그 통로가 막혀버리면 욕망의 흐름이 차단되어, 일종의 자폐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학문하는 묘리는 다른 것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다면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라도 물어야 한다. 어린 종이라도 나보다 한 자를 더 안다면 그에게 배울 것이다.... 옛날 순임금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그릇을 굽고 물고기를 잡는 것에서 임금 노릇을 하는 데 이르기까지 어느 것도 남에게서 배워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자는 말하기를 자기가 어려서 미천했기 대문에 상일에 아주 익숙하였다고 했으니, 그 역시 밭갈고 씨를 뿌리며 그릇 굽고 물고기 잡는 따위의 일일 것이다. 비록 순임금이나 공자와 같이 거룩하고 재주 많은 분도 물건을 보고서 기교를 생각해내며 일에 당해서 기구를 만들자면 시일도 부족하고 지혜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임금과 공자가 성인이 된 것도 남에게 묻기를 좋아해서 배우기를 잘한 데 지나지 않는다. - 박지원(북학의서)